마이모니데스(Maimonides) 스페인 철학자 ·신학자 ·의학자 ·천문학자. 1135 / 1138 ~ 1204 (69?)

유대계 철학자·신학자·의학자·천문학자. 무와히도 아침 유대교의 박해 때문에 각지로 방랑하고 의업에 종사했다. 이슬람 교단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유대 신학을 조정하려던 『 방황하는 자를 위한 안내서 』이 유명하다.마이모니데스(Maimonides)에스파냐의 철학자. 별명은 Maimon, Mose-shen. 코르도바에서 출생. 소년기에 종교적 탄압을 피해서 아빠와 함께 카이로로 이주, 아라비아 철학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유대교 최대의 신학자로 알려지지만 세계는 신에 의해서 없는 시간 속에서 창조된 것인 인간의 영혼은 달나라에서 흘러나온 능동적 이성에서 획득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영혼을 잘 훈련되고 능동적 이성을 더욱 더 잘 받도록 하는 것이 철학이다. 유대 신학 사상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성으로 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마이모니데스은 계시에서 이성을 지키기 위해서 해석학적 방법을 사용한다. 경전에 표현된 신에 대한 묘사가 인간의 언어가 가진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이성의 한계에 대한 보수적 견해가 경전을 넘는 진보적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레오·스트라우스(Leo Strauss)는 “서양의 중세 정치 철학을 이해하려고 할 때, 몇가지 유의해야 되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첫째, 과거를 현재의 잣대로 평가하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과거보다 현재가 뛰어나거나 현대인의 시각에서 중세 정치 철학을 멋대로 재단하려는 태도를 버린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중세의 철학자들이 찾으려 한 항구적인 진리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 시기에 한정된 논쟁으로 치우지 않고 우리가 가진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고 텍스트 자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주문이다.특히 중세 유대 교도와 이슬람 교도가 쓴 정치 철학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이런 충고에 유의해야 한다. 중세 유대교와 이슬람의 정치 철학 책은 단순히 고대 그리스의 정치 철학과 중세 기독교의 정치 철학을 잇는 “가교”정도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고 그들의 정치 철학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틀에 갇혀서 심하게 왜곡되거나 그 자체에 내재하는 풍부한 자산까지 도외시되어 왔기 때문이다.실제로 우리는 중세의 정치 철학을 이해할 때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Tertullianus)이후 계속된 “아테네와 예루살렘”라는 구분에 집착하는 추세다. 즉”이성”을 대변하는 그리스 철학과”계시”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이 갖는 긴장을 전제한 뒤 이런 긴장을 해소하려는 노력의 결과로서 중세 정치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다.그러나 중세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도 “이성”과 “신앙”의 긴장이 중요한 철학적 주제갔다고 속단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 성서는 “계시”뿐만 아니라”이성적 관찰”도 함께 서술된 것으로 이해되고 성경을 이해하려는 목적도 “신앙”이나 “교리” 아니다”율법”에 맞춰졌기 때문이다.즉 중세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 “성경”을 둘러싼 논란은 “철학적”이거나”교리적”이라기보다는 “법적”인 “정치적”이며”이성”과 “신앙”의 긴장이 기독교 세계의 같은 심각한 철학적 고민을 불러일으켰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신의 언어로 기술된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질문은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한편, 이 문제는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종교적 논쟁에 귀결하고, 또 한편으로 이 문제는 바람직한 법 체계 또는 정치 체제의 근거를 어디에 둬야 하느냐는 정치적 고민과 결합했다. 동시에 이 문제는 신이 창조한 질서와 인간의 지적 능력의 한계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을 동반한. 바로 이것이 중세 유대교와 이슬람의 정치 철학, 특히 마이모니데스이 여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이다.디아스포라 속의 유대인알파시 마이모니데스는 스페인·안달루시아(Al-Andalus)의 코르도바(Cordoba)에서 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안달루시아의 유대인들은 기원전 6세기”바빌론 유수”이후 유대교의 중심지인 바빌로니아를 능가하는 지적 풍요로움을 누리고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에 정통한 학자들이 모여서 학교를 세우는 교육에 열을 올린 지식의 산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런 학자 중 한 명인, 루세나(Lucena)의 유대교 대학(yeshiva)지도자였던 알파시(Issac Alfasi)의 해석에 따른 랍비들 중 한명이었다. 그 후, 재판관(dayyan)에도 봉직했지만 그만큼 그는 유대인의 “규례”(halakhah)에 정통한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 공동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지도자였던 것이다.종종 마이모니데스의 스승으로 알 피시와 아버지를 가르쳤다, 그림 물감(Joseph Ibn Migashi)이 언급되지만 그가 자신의 아버지에서 배운 해석을 반박할 때 사용한 수사적 표현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알 피시는 그가 태어나기 채전에 작고했고, 그림 물감도 그가 너무 어릴 때부터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유대교 율법과 전통에 대해서 배우고, 그의 정치 철학에는 안달루시아의 지적 환경에서 발전된 사상이 큰 영향을 미쳤음은 부정할 수 없다.마이모니데스이 생애의 대부분을 북 아프리카에서 지냈다는 사실도 그의 지적 배경으로서 안달루시아의 흔적을 배제할 수 없다. 13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알 모하도(Almohad)왕조의 종교적 탄압을 피해서 망명하고 12년 후에 지금의 모로코에 있는 펫츠(Fez)에 정착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안달 루시안이 있었다. 거짓으로 개종한 뒤 비밀리에 유대교 율법을 준수한 가짜”선교자들”(Marranos)을 옹호하는 편지를 쓸 때, 구전 율법의 성문집인 미 슈나(Mishnah)에 대한 집필을 시작할 때 안달루시아에서 배양된 유대교에 대한 지식이 그의 판단에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마이모니데스이 다시 강화된 종교적 탄압을 피하고 이집트의 프스탓토(Fustat, 지금 카이로)에 정착한 1165년 이후에도 그의 인생은 안달루시아를 떠나서 헤메고 있을 때의 긴장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 했다. 그의 지식이 북 아프리카를 넘어 곳 곳에 알려진 때도 1177년에는 푸스 엘스타트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가 된 뒤에도 1185년부터 당시 이집트를 다스리던 아유비도 왕조의 넘버 2였다 알파 딜(Al-Fadil)의 주치의로 편안한 궁정 생활을 보내면서도 디아스포라로 발버둥 치는 유대인이었다.편안한 인생이 보장되는 만큼 그는 더 집필과 연구에 매진하다, 이런 성실성에서 그는 유대교를 넘어 기독교 세계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정치 철학자로 거듭났다.『 미 슈나 주석 』과 이성적 판단의 본래의 제목이 “빛의 책”(Kitabal-Siraj)이었다 『 미 슈나 주석 』은 마이모니데스이 1161년부터 1168년 사이에 저술한 구전 율법 성문집(Mishnah)에 대한 해석이다. 일반적으로 “미 슈나”은 크게 3개의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모세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5개의 성경(창세기, 출애굽기, 레 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술된 율법을 설명하는 “미드 러시”(midrash)일상에서 준수해야 하는 법규와 관습이 주요 내용을 이룬다”하라카”(halakhah), 그리고 일반인에게 율법을 쉽게 전달하기 때문에 에피소드와 전설로 구성된 “아가다”(aggadah)이 3개의 구성 요소이다.그러므로 20대 초반에 이런 엄청난 율법의 해석이 가능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지적 능력뿐 아니라 지식의 폭에서도 이미 남달랐다는 점을 알 수 있다.실제로 『 미 슈나 주석 』은 이후 기술된 『 토라 재고 』(Mishneh Torah, 1180)과 함께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학파(Geonim)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한편으로는 미슈나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을 정리한 탈무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탈무드에 기록된 다양한 모순된 논쟁 중 어느 것이 타당한지를 증명하면서 그는 바빌로니아에서 편집한 탈무드에만 집착할 당시의 지배적 견해에 도전한다. 대신 그는 더 타당한 판단이 바빌로니아의 탈무드에 기술되지 않은 다른 자료를 통해서 증명된다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율법”을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정당성의 기초를 제시하려 노력한다.마이모니데스의 『 미 슈나 주석 』 필사본보다 구체적으로 마이모니데스은 『 미 슈나 주석 』에서 “의례”(halakhah)조차”계시”의 산물이라고 부르는 바빌로니아 학파의 입장에 일침을 가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모세(Moses)가 시나이 산에서 신으로부터 받은 613개의 “계명”(mizvot)와 달리”규례”은 신의 계시가 아니라 모세가 집필한 경전(Torah)을 현인들이 경우에 맞추어 해석하는 집행했을 뿐이다.즉 전자는 “잘못 전승되는 것도 없다”논쟁 거리가 될 것도 못하지만, 후자는 계시가 아닌 연역적 추리와 해석을 통해서 축적되는 이성적 판단이기 때문에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좀 더 상세히 설명하면”규례”의 근거로 이성적 판단을 제시함으로써 마이모니데스은 한편에서는 모세의 경전을 둘러싼 논란을 해소하고 한편으로는 랍비들의 입에서 전승된 “규례”이 일관하고 타당한 판단의 근거가 있음을 설득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모세가 신의 계시를 통해서 받은 “계명”에 “예언”이나 “기적”와는 다른 배타적 지위를 부여하고”계명”의 준수와 “계명”에 언급되지 않은 새로운 경우에 적용된 이성적”추론”(qiyas)과 구전되어 온 랍비적 해석으로부터 독립한 법적 근거를 보장한 것이다.이런 설명의 틀은 그 후의 저작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마이모니데스은 한편으로는 “계명”에 대한 이성적”추론”로 구성된 “규례”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고 한편으로는 구전된 “규례”의 타당성을 “계시” 아니다”이성적 판단”에서 찾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전자는 “예언”이나 “기적”이 “계명”의 준수나 “규례”집행에 개입할 수 없다는 정치적 입장에서 체계화되고, 후자는 경전(Torah)의 해석과 관련해서”계명”본래의 의미를 해치지 않는다”연역적 추론”해석학적 원칙에 귀결된다.어느 쪽의 입장도 제한적이지만 일신교의 환경에서 “이성적 판단”에 일정한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기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방황하는 자를 위한 안내서 』의 비교적 서술 『 미 슈나 주석 』가 대중적 저술이 있다면 『 방황하는 자를 위한 안내서(1190)』(Moreh Nevukhim, 이후 『 안내서 』)은 철학적 지식을 습득한 사람 중에 “율법”의 자구적 의미에 혼동이 온 경우나 “율법”다양한 논쟁과 관련하고 적절한 판단을 못할 경우에 초점을 맞춘 저술이다. 비록 자신의 저술을 “입문서”처럼 보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없지는 않지만, 결국 마이모니데스이 이 책을 쓴 의도는 대중이라기보다는 철학적 훈련을 받거나 법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특별한 독자를 염두에 두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여전히 마이모니데스의 『 안내서 』에 담긴 이중적 태도, 즉 대중적 입문서와 철학적 전문서 사이로 노출된 애매한 입장은 많은 논란을 부른다. 한편으로는 이런 이중성이 내포하고 있는 전통적인 유대교 성경 해석과의 충돌에 초점을 두고 마이모니데스의 정치 철학의 독보적 위치를 강조한다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이중성이 유대교 전통 속에서 충분히 용인할 수 율법적 경계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한다.마이모니데스의 『 방황하는 사람을 위한 매뉴얼 』의 표지, 경우에 따라서는 전자와 같은 해석을 『 안내서 』에 기술된 은밀한 가르침을 찾으려는 이유로 “비교적”(esoteric)인 접근이라는, 후자를 명시적으로 노출된 내용을 중심으로 해석하려는 이유에서 “대중적”(exoteric)접근이라고까지 부른다. 그러나 특정의 틀에 가두어 텍스트에 내재하는 비밀을 찾아내는 것 자체도 문제가 있지만 마이모니데스이 “스스로 파악 못하는 사람”에 “신의 창조”과 “여호와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를 신중하게 전달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는 사실까지 무시할 수 없다.즉 마이모니데스의 율법 해석은 곡해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자신을 정치적으로 큰 위험에 빠뜨리는 대중적 접근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책은 유대인 공동체 내부의 도전을 감수해야 하며 같은 이유로 “보수적”인 해석과 “급진적”해석이 충돌하게 보일 때에도 수사적 표현과 논리적 흐름을 구분하고 그의 주장을 찾아야 할 부분이 많다.물론 이런 이중적 수사를 해석에 고려하는 것 자체를 문제시하여 텍스트 해석의 깔끔함까지 손상시킬 필요는 없다. 이런 수사적 태도는 이 시대를 살았던 아베로에스(Averroes)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며, 플라톤 이후의 정치 철학으로 기술된 책에 잘 보인다 서술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때는 감정에 치우친 판단을 하는 “다수”과 이성에 근거한 성찰이 가능한 “소수”긴장, 때로는 철학에 무관심한 “대중”에 필요한 “시적 수사”와 철학적 성찰이 가능한 “엘리트”에 필요한 “철학적 논증”의 차이, 그리고 예상되는 정치적 위험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문제는 어떤 철학자도 불가피한 숙제였다 때문이다.마이모니데스과 아리스토텔레스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의 흉상. 대리석, 기원전 330년 레시포스(Lysippos)가 만든 동상의 모사품들. 표면에 덮인 설화 석고는 현대에 부과됐다.이처럼 『 안내서 』을 이해하면 크게 2가지 주제가 부각된다. 첫째는 “창조”과 관련된 논란이다.유대교 전통에 세상은 특정 시기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ex nihilo)신에 의해서 창조되어 이때”창조”의 직접적인 원인은 신의 “의지”으로 이해된다. 반면 당시 마이모니데스이 따르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는 “처음의 원인”로 신은 ” 아닌 것”을 창조하려는 “의지”를 가져서는 안 된다. 즉, 완전한 존재로 신은 결핍을 이유로 다른 뭔가가 추동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신이 세상을 창조하겠다는 의지를 가졌다는 말 자체는 신의 완전성을 심각하게 파괴한다고 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신의 의지”가 만물을 주관한다는 유대교 전통에서는 이런 철학적 논증이 불허됐던 것이다.이 문제와 관련해서 마이모니데스은 한편으로는 유대교 전통”창조설”을 받아들이고 한편으로는 “창조”에 대한 철학적 논증이 가능함을 증명하려고 한다. 즉”창조”의 주체로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신이 있는 결핍에서 초래된 “의지”를 갖지 않은 것을 논증 하려고 한 것이다.전자 같은 “보수적”독해는 당연히”우주의 영원성”을 믿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배반되는 것이고, 후자 같은 “진보적”해석은 만물의 주권자로서 신의 인간사의 개입을 인정하는 유대인의 전통과 상반된 것이었다.실제로 마이모니데스의 해결책은 철학적 논증보다는 해석학적 설득이다. 기록된 자구를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 뒤 인간”의지”와 신의 “의지”가 같은 언어로 표현되도 다르다고 설명한다. 즉 신의 “의지”은 결핍과 다른 외생적 동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신”은 인간의 제한된 지식으로 모두 알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철학적 성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한편으로는 “경전”(Torah)의 무결함을 옹호하고 한편으로는 신이 창조한 “자연”의 섭리에 대한 이성적 성찰을 부각시키기로 율법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방어하려 했던 것이다.두번째는 “신의 실체”이다. 유대교에서는 신의 존재와 그 단일성에 대해서 누구도 혐의가 없다. 매일 반복 구문(shema)도 “신의 존재”와 “신의 단일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문제는 “경전”에 언급된 다양한 형태의 “신의 속성”에 대한 묘사가 신이 인간처럼 “육체”를 드는 듯한 느낌을 주고, 그 결과 신의 “단일성”에 대한 내적 모순이 “경전”내부에 존재하게 비친다는 것이다.마이모니데스에게 이 문제는 단순히”신의 실체”이 논증 할지 아니다.그에게 이 문제는 “계명”에 등장하는 “우상 숭배 금지”의 실효성과 관련이 있다. 만약 신이 인간 육체의 같은 실체가 있다면, 여호와(Yehovah)이외의 어떤 사물 또는 형상을 숭배하지 못하도록 막았다”계명”자체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본것이다. 또 신은 육체를 갖지 않는다고 믿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교도였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방어할 필요도 있었다. 신의 실체를 멋대로 상상하며 그런 신의 실재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우상 숭배”에 불과하고 이런 상상과 신의 실체에 대한 철학적 논증이 구별된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마이모니데스이 선택한 해결책은 이른바”소극적 신학”(negative theology)이다.그는 신의 실체에 대한 논쟁이 인간의 한계를 무시한 지나친 낙관부터 시작됐다고 전제한다. 그 후”경전”에서 신은 여러가지 특성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이러한 묘사는 신이 모세에게 베푼 총체적 본질을 인간의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한계를 갖게 됐다고 설명한다.예컨대”신이 화가 났다”라는 표현은 인간이 분노를 표출할 때 같은 행동으로 신의 움직임을 이해했을 뿐 이것이 신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의 단일성은 결코”경전”을 통해서 부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성의 한계에 대한 “보수적”이해에서 “경전”을 넘는다”진보적”해석이 가능하게 된다.마이모니데스의 정치 철학플라톤(왼쪽)과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라파엘로 그림<아테나 학당>일부 마이모니데스이 서양의 정치 철학사에서 남긴 발자취를 감안할 때 3가지 측면에서 그의 정치 철학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유대교의 전통에서의 그의 업적이다. 그는 무엇보다 “계시”에 근거한 유대교 전통이 갖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이성적 판단”이 축적된 “의례”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또 한편으로는 “예언”이나 “기적”을 통한 신의 개입을 정당화하려는 입장에 대항하면서 신이 창조한 “자연의 질서”에 대한 이성적 성찰을 통해서도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려 했다. 이런 노력은 “계시”과 “이성”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로 “자연 법”적 판단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신앙”과 “이성”긴장을 해소하려고 노력한 중세 기독교 세계에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었다.둘째, 아리스토텔레스 정치 철학의 변용이다. 전술한 것처럼 마이모니데스은 필요 시 선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받아들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그는 신플라톤 주의의 그늘에서 거의 벗어난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다. 특히”법”의 목적에 대한 서술이 그렇다. 그는 법의 목적을 영혼과 육체를 모두”최상의 상태”에 이끌것으로 전제하고 법을 통해서 덕을 함양하면 사회 구성원이 조화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이때 그는 인간은 선과 악의 판단을 할 수 있지만 도덕적으로 선이라고 해도 신의 섭리에 대한 지식을 통해야”영혼의 행복”에는 못 미친다는 말을 덧붙였다.한마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적 인생”에 대한 논의가 “법의 목적”과 관련하고 새로운 형태의 제도적 구상까지 진전할 수 있는 길을 연것이다.셋째, 법 제정자와 관련한 논의이다. 일견 플라톤의 “철인 왕”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플라톤은 아니다”경전”에 근거한 주장이다.그는 모세처럼 “새”를 제정한 “예언자”를 “정치가”나 “철학자”과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에게 정치가들은 공동체 구성원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서 어떠한 전망이 가능한지를 대중에게 설득하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철학자는 이성적 추론을 통해서 정확한지 판단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대중의 언어로 설명할 능력이 없다. 반면 모세 같은 예언자는 정치가의 “상상력”, 철학자의 “지성”을 갖춘 완벽한 사람이다.즉 대중의 “의견”에 휘둘리거나”기적”을 통해서 환심을 사려고 하기보다는 “법”을 제정하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을 정치가의 우선적 책임으로서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논의는 이후 서양 정치 사상사에서 “소켄자”의 역할과 “헌법”의 기능에 관한 수많은 논쟁의 기초를 제공했다.마이모니데스(Maimonides)명언 1. 모든 존재가 인간 때문에 존재한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모든 존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2. 만약 내가 가르치는 것이 단 한명의 인간을 기쁘게 하고 1만명을 화가 나서 만들면 오직 한 사람을 반기는 쪽을 택할 거야.3. 지식의 추구 정의에 대한 열렬한 사랑, 개인적 자립이 나도 그 중 한 사람인 유대 민족의 전통인 저도 이런 별 아래 태어난 것에 감사하고 있다.4. 이웃의 원수가 있는데, 이웃을 칭찬하는 것은 제2의 욕설과 마찬가지다.왜냐하면 그것이 질투심을 부추기고 그 사람의 욕을 끌어내기 때문이다.5. 만약 당신이 일하지 않았는데 보수를 얻었다면, 어딘가에 일을 해도 보수를 얻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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